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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한국활용홈 ]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글쓴이 : wlTsp024 날짜 : 2020-04-20 (월) 00:32 조회 : 156
해당 자료나 문건들의 논리 전개 방식은 

황현필 선생님의 영상을 많이 참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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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따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한다.



03.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남녀평등에 입각하여 민주적인 방식으로 공직자를 뽑는 첫 선거가 열린다. 
흔히 5.10 총선거, 제헌 국회의원 선거라 부른다.

당시 제헌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다.






04.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7월 17일.


5.10 총선거를 통해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우리나라의 첫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때 생긴 헌법을 기초로 하여 첫번째 대통령이 간접선거를 통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이승만이 당선된다.
당시 대통령의 임기는 미국은 본따 4년 중임제였다.

미국의 4년 중임제 : 4년 임기로 선거를 통해 2번까지 할 수 있음.



21.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이승만



06.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50년 5월 30일.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다.

당시 반민특위 등으로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이승만은 민심을 크게 잃었고, 김구의 암살 사건에 이승만이 연루되었다는 소문 등으로 인해 이승만의 여론이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총선을 12월로 미루고자 했으나,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그러지 못하였고,
결국 이승만 지지세력들대거 낙선하게 된다.







07.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6.25 전쟁이 발발한다.






02.pn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서울은 안전합니다!"
(실제로 이승만은 이런 발언을 하진 않았고, 해당 사진도 6.25 당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5.30 총선 참패로 인해 이승만의 연임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전쟁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자 하였으나,

하지만 국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05.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52년 5월 25일

이승만은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 공비소탕이라는 구실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고,
26일 국회에 등정하던 국회의원 4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에 연행하였다.

정치자금 유입으로 국제공산당에 관련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6월 21일

정부는 직선제 개헌의 정부안에 야당의 양원제안 일부를 수용한 소위 발췌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발췌개헌)
개헌 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경찰이 피신해 있던 의원들을 붙잡아 강제 등원시키고, 국제 공산당 사건 관련자들도 석방하였다.



7월 4일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기립 투표 방식으로 발췌 개헌안 표결이 진행되었다. 
개헌안은 출석 의원 166명에 가(可) 163명,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다. 7월 7일 개정된 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이 발췌개헌에 따라



1952년 8월 5일. 

두번째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치뤄지고, 이승만이 연이어 당선된다.









08.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54년 5월 20일.

6.25 전쟁이 끝나고 제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뤄진다.

당시 이승만은 자유당 후보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이른바 "곤봉선거"를 실시한다. 

경찰들을 동원해 억압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선거를 치르게 하였고, 정치 깡패등을 동원하여 야당 후보들을 억압하는 등 선거를 방해하였다. 당시 조봉암은 선거등록서류를 탈취 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해 출마를 포기하게 될 정도였다. 

결국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게 된다.




09.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54년 11월.

이승만은 발췌개헌에 만족하지 못하고, 2회로 제한된 대통령 연임 제한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새로운 개헌안을 발표한다.


당시 국회의원 의석 수 203명 중 찬성표가 2/3 이상인 136표 이상이 나와야 했는데,
(203 * 2/3 = 135.33333....)



하필이면 딱 "135표"가 나와 개헌안이 부결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서울대 교수의 "사사오입 발언"을 인용하여,


"135.333...를 사사오입(반올림)하면 135이다"


는 희대의 논리를 가지고, 결국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당시 이 발언의 주인공인 서울대 박세희 교수는 단순히 제자들이 한 질문에 답하였던 것 뿐이었다고 밝혔으며,
이를 정치권에서 서울대 교수라는 권위를 이용해 악용했던 것이다.

훗날 이 사건을 "사사오입 개헌"이라 한다.





14.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56년 5월 15일.

3번째로 열린 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의 대항마로 나온 신익희 후보가 전남지역 유세를 위해 기차로 이동하던 중 심장마비로 급서하게 되면서 또다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당시 무효표만 2백만표 가량, 무소속의 조봉암은 2백여만표를 득표 하면서 
(이승만의 득표 수 5백만표)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



는 명언을 남긴다.
(당시 부정선거가 꽤나 만연했다는 내부자의 증언들이 존재한다.)
 

24.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25.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신익희와 조봉암





17.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이후 조봉암진보당을 창당하게 되는데, 자유당에서 이를 간첩과 엮어 조봉암을 사형시킨다. (진보당사건)



32.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장면




10.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당시 지금과는 다르게 부통령 선거를 따로 실시하였는데,
이 부통령 선거에선 자유당의 이기붕을 꺾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된다.
이 위기감을 느낀 자유당장면을 저격하기까지 이르지만 총알은 빗나가 화는 면하게 된다.
(9.28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5.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1960년 3월 15일.

4번째로 열린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자는 자유당의 이승만 민주당으로 출마하게 된 조병옥.
부통령은 자유당의 이기붕, 민주당의 장면.

하필이면 조병옥이 선거를 앞두고 신병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잠시 떠나게 되는데,
이에 정부는 "농번기를 피해야된다"며 5월이었던 선거를 3월로 앞당기는 촌극까지 벌이게 된다.



하지만 선거 한달을 앞두고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서하게 되면서 이승만의 당선이 유력해지는데,
당시 이승만이 고령이었던데다가, 건강까지 그렇게 좋지 못해 대통령 선거만큼 부통령 선거도 매우 중요한 상황이었다.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하게 되면 모든 권한이 부통령에게 넘어가기 때문.)


그렇기에 자유당은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인규를 필두로 하여 부정선거를 계획하기 시작한다.




20.pn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2월 당시 장면 부통령 후보가 일요일 대구에서 선거 유세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혹시라도 학생이 몰리게 되면 장면의 선거 유세에 도움이 되진 않을까 싶어,
정부당국에선 학생들을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초,중,고등학생들을 '영화 관람'이나 '추가 시험' 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등교하도록 하였다.

이에 27일,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대거 시위를 벌이며 사태가 커지게 되고,
28일 정부 당국은 "공산당의 사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하여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 시킨다. 
(2.28 학생민주의거)








19.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당시 부정선거를 했던 내역은 다음과 같다.

  • 4할 사전투표 : 각 선거구마다 40%씩 이미 이승만, 이기붕을 뽑은 표가 확보 되어 있었다.
  • 3인조, 5인조 투표 : 글을 모르는 고령자 등을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대동하여 이기붕, 이승만을 뽑게 하였다.
  • 올빼미표 : 밤에 선거 표가 다 바뀐다.
  • 피아노표 : 장면이 찍힌 용지에 공무원들이 손에 인주를 묻힌 채로 막 피아노 치듯 장난을 쳐놔서 무효표로 만든다
  • 샌드위치표 : 묶여있는 투표용지 다발 묶음의 앞뒤를 이승만, 이기붕으로 하여 전체가 같은표인 것처럼 한다.
  • 투표장 내부에서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투표하는 모습을 보고 이승만과 이기붕을 찍도록 유도하거나,
  • 반공청년단,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어 뇌물, 협박 혹은 야당참관인을 쫓아내기거나
  • 심지어 죽은 사람 등이 선거인 명부에 오르는 등

갖가지 부정부패가 저질러진다.


너무 선거 조작을 열심히 하였는지, 이기붕과 이승만의 득표율이 95~99%에 육박하는 등 말도 안되는 촌극이 벌어지자, 자유당최인규에서 득표수를 하향 조정할 것을 지시하고 그 결과 이승만 88.7%,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발표하게 된다.


바로 선거 직전 학생 시위 등으로 들끓었던 대구에서조차 
이기붕이 5천표가 나왔다면, 장면표가 32표가 나오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12.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이에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되고 가장 크게 번졌던 곳이 바로 마산이었는데,
이들을 향해 경찰들이 발포하여, 시위대 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3.15 의거)



23.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이기붕


당시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라는 망언을 내뱉으며 시민들은 충격에 빠진다.





11.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김주열 열사


또한 이때 전주 학생 중 마산상고 입학 시험을 보러왔다가 마침 시위에 참여한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행방불명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어머니와 형들이 마산을 찾아와 아들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갖가지 소문이 퍼지기도 한다.
(이름 모를 경찰관이 시위 도중 살해 되어 경남도청 앞 호수에 버려졌다는 소문을 이야기 했다고 하여 그 호수를 싹다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36.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그리고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이 한 구 떠오르게 되는데,
이는 행방불명 됐던 김주열 학생이었다. 


그의 사진을 부산일보에서 특종으로 보도되었고, 
안 그래도 선거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던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성난 시위대는 대대적인 봉기에 나서며 마산시청과 경찰서를 습격하고 파출소와 공장,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의 집을 부시고, 경찰서에서 수류탄을 탈취하여 경찰서 건물에 던지거나 서장의 지프차에 불을 지르는 등 시위가 격해지기 시작했고,

경찰이 또다시 시민을 향해 발포를 하면서 한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이에 마산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여 경찰들과 공방전을 벌이며 대치하게 된다.


11일부터 13일까지 3일동안 시위가 이어지면서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이에 정부 당국은 "공산당의 사주가 있다"면서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고만 하였고, 
"공산주의자들의 의해 고무되고 조종되고 있다"는 거짓 선동을 덧붙였다.









16.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4월 18일.

서울에서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첫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지만,
고려대 총장이 직접 시위 현장에 나와 학생들을 만류하면서 시위는 그대로 끝나는 듯 싶었다.




 13.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하지만 정치 깡패들이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려대 학생들을 향해 집단 구타를 퍼부었고,
학생들이 길바닥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당시 문맹율도 상당히 높았고, 그 당시 대학생이면 국내 엘리트들이며 나라를 이끌 인재라 평가 받던 시절이기도 하거니와, 그 당시에도 인간 쓰레기 취급 받던 정치깡패들의 폭력으로 인해 이들이 짚밟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엔 충분했다.













18.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그리고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이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다.
서울에서만 10만명의 인파가 몰렸고 이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운채 경무대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이에 경찰이 또다시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하기 시작하고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게 된다.




28.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이에 정부당국은 19일 오후 4시 30분.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는데,

계엄군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서울에 계엄군이 진주하자 어느 노신사가 계엄군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죽이고 싶다면 얼른 죽여라!"라고 울부짖었고 이에 지휘관이었던 젊은 장교가 당황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들끼리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자 시위대는 군대가 시민의 편이라고 환호하고 군인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사건도 있었다 한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어가기 시작했다.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우고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쫓기고 쫓기기를 거듭했다. 시위대는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참고 링크 : http://www.ynamnews.co.kr/paper/news/print.php?newsno=13294)




26.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더구나 미국까지 이승만을 등지면서, 이승만의 지지 세력은 점점 힘을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하야를 하기 싫었던 이승만은 

3.15부정선거를 인정한다거나,
이기붕의 당선을 무효로 한다거나, 
최인규 내무부 장관을 사퇴시킨다거나,
이승만이 자유당 총재직에서 사퇴한다는 등의 발언들을 하지만


시위대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0.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그리고 4월 25일.
서울의 대학교수들까지 거리에 나와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내세우며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한다.




22.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결국 4월 26일 화요일.

"승리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이날, 이승만은 이기붕과 함께 사임을 선언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이후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이때 했던 발언이 바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물론 이승만은 다음날인 27일에 사임서 제출을 거부하거나,
미국으로 떠나면서 금방 돌아올 것을 이야기하는 등 실제로 스스로 하야할 생각이 있던 것인지는 의문.






27.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이기붕 일가와 이승만. 가장 왼쪽이 이강석.


4월 28일.

당시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하였던 육군 소위 이강석이 
친아버지인 이기붕과 가족 모두를 총으로 쏴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37.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허정


32.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33.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장면과 윤보선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이 만장일치로 결의 되었고, 당시 수석국무위원이었던 허정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1960년 7월 29일. 제5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장면 국무총리.
그리고 8월12일. 의원 내각제를 기반으로한 간선제를 통해 대통령 윤보선이 당선되면서 제2공화국이 시작된다.












31.jpg 1960년 4월 19일. 4.19혁명 그날까지의 기록.


그리고 1년뒤 1961년 5월 16일.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쿠데타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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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포인트 2020-04-20 (월)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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